안녕하세요 해외선물 정프로입니다.
오늘 하루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늘 성공투자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과거 1960년대 국내 전체 시가총액 979억 중 300~400억을 보유하고 있었던 부자가 있었습니다.
명동의 큰손, 주식인생 80세까지 실패 한 번 없이, 주식으로만 수천억 대 자산을 형성한 사람으로 정식투자의 고수인 명동의 큰손, 백희엽여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드리고자 합니다.
백희엽여사에 출생 추정 연도는 1915년으로 평양대지주의 딸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을 하였으며 6·25 전쟁 당시 소액의 돈만 챙긴 채 평양에서 남한으로 내려왔었습니다. 이후에 부산에서 페니실린과 같은 의약품을 판매하며 종잣돈을 마련하였고 대구에서 군복과 양말을 팔고 당시 군복을 염색하여 팔면 20배 정도의 이익을 불릴 수 있었습니다. 그 자금으로 1950년대에는 건축채권을 매입하였는데 1957년 당시 액면가 20%에 거래되는 국채파동때 닥치는대로 채권을 매입하여 그 채권으로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 크게 형성된 자산으로 주식투자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1980년대에 건설주 큰 파동때 큰돈을 만지게 되었고 1970년대 초 삼보증권(대우증권)의 지분을 10%나 소유한 2대 주주가 되었습니다.
한 칼럼기사를 인용해 백여사님의 이야기를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1970년대 말, 매일 증권사에 출근하다시피 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키는 어림잡아 150cm 정도 안팎으로 작고 뚱뚱한 노인이었는데, 노인은 한 손에 영국타임지를 들고 증권사 객장에 앉아 한참 동안 시세판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에도 영문잡지를 술술술 읽어내려가며 경제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그녀를 보고 사람들은 '백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본명보다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고(故)백희엽 여사는 평양 대지주의 딸로 태어났으며, 일찌감치 건설주를 사들였던 백여사는 1970년대 중반 오일달러로 무장한 건설주들이 증권시장에서 널뛰기하면서 단번에 증권가의 큰손 반열에 올랐습니다. 건설주로 이른바 대박을 거머쥐긴 했지만, 과거 그를 알았던 사람들은 아주 모범적인 투자가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요즘 말하는 가치투자를 몸소 보여줬다는 평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학생 때 따라다니며 배워…
삼보증권(현 대우증권) 회장과 증권업협회장을 지냈던 강성진 전 B&B증권 명예회장은 백 여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이라고 회상한다했습니다. 강 전 회장은 "백희엽씨는 반드시 우량기업에만 투자하고 한번 투자하면 적어도 2~3년 보유할 정도로 아주 정석 투자자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강 전회장에 따르면 백 여사는 대차대조표나 손익계산서 같은 재무제표를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기업 관련 정보에 대한 해석 능력이 뛰어났다고 하며, 또한 부동산과 같이 확실한 핵심 자산이 있거나, 순이익을 꾸준히 내는 기업을 좋아했다 하였습니다. 일찍부터 '자산주'나 '가치주'에 대한 투자를 즐겼던 셈이었습니다.
백 여사는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의 스승으로도 유명합니다. 박 회장은 대학원생 시절 백 할머니라는 분이 명동사채 시장의 큰 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백 여사를 찾아갔습니다. 증권거래소는 1979년 8월 여의도로 이전하기 전까지 명동에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명동사채 시장의 큰 손이라고 하면 보통 주식 시장의 큰 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박 회장은 백 여사에게 대뜸 '주식 투자를 좀 가르쳐 달라'하며 졸랐다고 합니다. 다음은 박 회장의 회고록과 과거 인터뷰 등을 통해 했던 말입니다. "어찌어찌하다 백 할머니 뒤를 따라다니게 됐습니다. 할머니 사무실로 출근하고 증권사나 기업체 방문때 동행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분께서 정식투자만 하는 거예요. 답답할 정도로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광화문 곰'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 회장에 따르면 백 여사는 사회적 기여도 높은 기업이나 수익성이 좋은 기업 주식만 골라 사들였습니다. 한 번 사들여 놓은 주식은 2년이고 3년이고 기다렸다가 주가가 오르고 매수 대기자들이 나타나면 비로소 차익 실현에 나섰습니다. 박 회장은 백 여사의 이러한 투자 방법을 보면서 우량주는 반드시 제 몫을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합니다.
◆ 너덜너덜 헤이진 옷에 짜장면만 먹을 정도로 검소
백 여사는 1960년대 말부터 주식투자를 시작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백여사는 대지주의 딸이었지만, 급히 피난을 오는 통에 수중에는 돈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백 여사는 첫 둥지를 튼 부산에서 페니실린과 같은 의약품을 판매하여 종잣돈을 마련한 후에 대구에서 군복장사를 통하여 돈을 불렸다고 합니다. 주식투자는 이대 사업을 하여 번 돈으로 시작했습니다.
백 여사는 1960년대에 이미 수백원대의 현금을 보유했던 거부였으면서도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강성진 전 명예회장은 "백 여사는 1970년대 초 삼보증권(현 대우증권)의 지분을 10%나 소유한 2대 주주였으면서도 점심은 항상 자장면만을 먹을정도로 검소했다"며"광화문 곰과 백 할머니는 주식시장에서 현금부자로 매우 유명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백 여사는 수입 물품을 끔찍이도 싫어했다고 합니다.
백 여사는 백선엽 전 육군 참모 총장 겸 한국전쟁기념재단 이사장의 사촌 누나이기도 합니다. 백 여사의 장남인 박의송 씨는 삼보증권 상무이사를 거쳐 1990년대 중반 우풍상호신용금고 회장을 지냈습니다. 증권가의 신화로 통했던 백 여사는 1992년 초 중풍으로 쓰러진 뒤 병마와 싸우다 1995년 8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백 여사가 타계했을 당시 언론에서는 백 여사의 실물자산만 200억 원 규모로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우량주에만 투자했기 때문일까요, 백할머니는 광화문 곰과는 다르게 크게 실패하지 않고 증권가를 떠날때까지 그 명성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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